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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사 승가대학 구호 물품 스리랑카 피해 격오지에 직접 전달
청암사 승가대학 스님들이 보내 온 온정의 구호품이 스리랑카 이재민의 지친 마음을 감싸고, 희망을 심어주고 있다. ‘더 빨리, 더 많이’ 전달해야 할 이재민 구호품 전달을 위해 청암사 스님들은 신속하게 성금을 모았고, 구호품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피해지역 가운데 오지만을 찾아 직접 방문해 전달했다. 여기에는 스리랑카에서 2년간 유학하고 지난해 10월 말 귀국한 청암사 승가대학 교무 자목스님과 현재 스리랑카에서 유학중인 청훈스님, 원행스님, 다경스님 등 네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직 이재민을 위한 자비로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난해 12월 26일 일요일 오후 김천 청암사 승가대학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학인스님들의 교학 열정만이 산사의 조용한 휴일 오후를 달구었다. 정적을 깬 것은 이날 늦은 오후부터 국내의 텔레비전 뉴스와 CNN을 시청하는 스님들이 교무 자목스님을 찾으면서부터다. “남아시아 지역에 큰 해일이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답니다. 스님이 유학갔던 스리랑카도 피해를 크게 보았답니다.”
피해 현황은 하루가 갈수록 늘어났다. 3000명이었던 사망자가 1만명, 3만명, 5만명, 10만명을 넘어섰다. 스리랑카만 해도 3만여명이 사망했고, 이재민만 100만명이 넘어섰다는 보도가 연일 뉴스를 타고 전달됐다. 자목스님은 산사에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은사스님인 주지 상덕스님을 찾았다. “스리랑카로 가봐야겠습니다. 제가 도움이 될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꼭 가야겠냐, 여기서도 도울 일이 많이 있지 않겠냐”며 만류했다. 처참한 장면과 위험한 상황을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본 주지 상덕스님은 상좌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알았지만 전쟁지역보다 처참하고 위험한 곳에 쉽사리 상좌를 홀로 보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목스님은 스리랑카 현지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구호 물품이 모아진다고 해도, 현지 이재민에게 나눠주기까지는 많이 시일이 걸릴 것이고, 나눠 준다고 해도 필요한 사람에게 골고루 물품이 전달될 수가 없다. 스리랑카의 행정 체계와 구호 체계가 열악한 것을 잘 알고 있는 스님은 가만히 뉴스만을 볼수 없었다.
다시 주지스님을 찾았다. “꼭 가봐야 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상좌의 굳은 의지를 확인한 스님이 “조심해서 다녀오라”며 허락했다. 출국 준비를 하는 자목스님에게 학인스님과 대중스님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주었고, 자목스님은 8일 인천공항을 통해 출국했다. 불과 두달전 스리랑카를 떠나면서 “내 현생에는 다시 돌아오기 힘든 곳”이라며 떠났던 곳이었다. 스리랑카는 유학 시절 죽음을 넘다드는 열병을 견디면서 공부했던 곳이다.
9일 새벽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 도착한 스님을 세 명의 비구니 스님이 애타게 기다렸다. 청훈스님, 원행스님, 다경스님이다. 비구니 스님 3명은 6일 스리랑카 남부 지역의 피해지역을 돌며 구호물품을 전달했다. 구호품을 전달하며 “더 가져올 걸” 아쉬워했었는데 자목스님이 온다는 소식에 스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청훈스님은 동학사 승가대학을 졸업했고, 원행스님은 봉녕사 승가대학을 다경스님은 동국대를 졸업했다. 모두 한국 불교의 교학 발전을 위해 머나먼 스리랑카에서 팔리어와 초기불교를 공부중이다.
네 명의 비구니 스님은 새벽 회의를 했다. ‘무엇이 필요한지, 어디로 가야할지’가 주요 안건이었다. 가능한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것을 사기로 했고, 구호물품이 제대로 전달돼지 못하는 오지를 가기로 원칙을 세웠다. 9일과 10일 이틀간 물건들을 구하고 11일 새벽 떠나기로 했다. 장소는 남부 지역으로 정하고 탕골(tangalle)과 마타라(matara)는 콜롬보에서 7시간이 걸리는 지역이다.
9일과 10일 스님들은 구호물품을 구하기 위해 콜롬보 시장을 돌아 다녔다. 대형 마트에서는 필요한 물건들을 쉽게 구할 수 있지만 가격이 많이 올라있었다. 콜롬보 현지는 각국의 구호단체들이 구호품을 구하기 몰려와 대형마트의 물건값이 이미 많이 올라 있었다. 시장을 돌며 물건들을 구하기로 했다. 다행히 스님들은 현지 사정에 밝았다. 물건 구입은 9일 늦은 밤과 10일 새벽까지 이어졌다. 10일 오후가 되자 빵을 제외한 대부분의 물건들을 살 수가 있었다. 빵은 가장 늦게 구입하기로 했다. 발품을 팔아 돌아다녔기 때문에 온몸은 지쳐있었지만 애타게 구호물품을 기다리는 이재민 생각에 쉼 틈이 없었다. 어렵게 트럭과 봉고도 빌렸다.
물건 포장은 위한 공간은 불자교민인 김상주씨가 자기의 집을 기쁘게 빌려주었다. 10일 오후가 되자 물건들이 하나 둘 김씨의 집에 모아졌다. 쌀과 빵, 접시, 분유, 설탕, 소금, 과자 등 열 네가지와 한국서 가져 옷이 마당 가득 쌓였다. 이제 자루에 포장하는 일만 남았다. 300명분의 물건들을 자루에 담는 것도 쉽지 않았다. 현지 교민들의 자녀인 엄정우, 홍윤경, 김조은 양이 도와줬다. 물건 포장은 저녁 10시가 다 되어서야 끝났다. 새벽 출발을 위해 트럭에 짐을 싣는 일만 남았다. 현지인을 고용하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재민에게 물건 하나라도 더 주기 위해 직접 하기로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온 몸에서 땀이 흘렀고 흐르는 땀 냄새에 모기들이 달려들었다. 허리가 끓어질 정도로 아팠고 팔은 힘이 풀린 채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저녁 12시가 다 되어서 모든 짐들이 트럭에 실렸다. 일이 끝나자 허기가 진 것을 알았다. 빵으로 채우기로 했다. 새벽 밥을 먹은 후 처음 먹는 식사였다.
알뜰히 시장을 보았기 때문에 돈이 조금 남았다. 스님들은 다시 회의를 했다. “지금은 구호품이 절실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현금도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적은 돈이지만 현금을 주자”는 의견이 나왔다. “혹 상처 입은 마음에 거부감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염려의 의견도 제시됐다. 결국 돈을 정성스럽게 포장해 주기로 했다. 500루피 현금을 일일이 종이를 접어 포장했다. 대신 잠자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새벽 5시 구호품을 실은 트럭과 봉고한대가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를 출발, 이재민 수용소로 향했다. 해안도로는 막힌 곳이 있을 것 같아 내륙 도로를 택했다. 식사는 봉고 안에서 가져온 빵으로 대신했다.
쉬지 않고 달려 왔는데도 함반토타에 도착한 시간은 11시였다. 6시간이 소요된 것이. 해변이 보이자 참혹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곳 저 곳 난민촌을 다녔지만 함반토나는 남부지역 최대 피해 지역이라는 언론 보도 때문인지 구호품이 모자라지 않았다.
차를 탱골로 이동시켰다. 곳곳의 경찰과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재민이 어디에 있는지, 구호품이 잘 전달되지 않는 곳은 어디인지를 물었다. 묻고 물어 탱골의 시골 동네인 마라 비드야라야 동네의 학교에 이르렀다. 67가구 215명의 이재민이 머물고 있는 곳이었다. 널리 알려지지 않아 구호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곳이었다. 트럭이 학교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눈길이 모였다. 스님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트럭에서 자루를 꺼냈다. 사람들이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사의 절을 했다. 스리랑카는 남방불교국가이기 때문에 비구니 스님에 대해서는 불자들조차도 잘 절을 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는 옷을 직접 입혀 주었다. 받는 손길과 건네는 손길이 하나가 돼 모두가 환한 웃음을 지었다.
구호품을 전달하고 차안에 오르자 원행스님이 손수건을 눈으로 가져갔다. 스님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애써 태연한 모습을 보이던 자목스님도 눈물이 나오는지 손으로 눈을 훔쳤다. 청훈스님은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스님들 때문에....”라며 눈물을 흘렸고, 다경스님은 “어려운 유학생활 동안에도 한번도 울지 않았는데...”라며 눈물을 흘렀다.
바쁜 발걸음을 재촉해 장소를 옮겼다. 해안가 마을 전체가 완파돼 임시로 수용소로 사용하고 있는 왈라우바타 동네에서 구호품을 전달하고 푼치의 절로 이동했다. 푼치의 사찰들은 현지에서 학교와 함께 이재민을 가장 많이 수용하는 곳이다. 또다시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사찰을 찾았다. 크지 않은 절에는 22가구 98명이 임시 생활터전을 마련해 살고 있었다. 트럭이 들어오자 누워있던 사람들이 몰려왔다. 구호품인지를 알자 모두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스님들을 보자 감사의 합장을 하고 눈물을 흘렸다. 이 절에는 부모 잃은 아이들이 많았다.10살의 수레쉬는 이번 해일로 아빠를 잃었다. 같은 또래 친구 에스데는 엄마와 두형을 잃었다. 집은 완전히 파손돼 아빠와 함께 절에서 머문지 15일이 지났다.
서쪽 도시의 골로 향하는 길에 코갈라의 히리갈 사원에 들렀다. 이 곳에도 이재민들은 있었다. 구호품을 나눠주자 어느덧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바쁜 걸은을 옮겨 텐트에서 살고 있는 이재민촌을 찾았다. 천막 난민촌에서 구호품을 전달하고 나와 물어 물어 인근의 사찰에 이재민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도로에서 떨어진 해안가 외지에 있어 많은 구호품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 곳이라고 한다. 포장되지 않은 좁은 도로를 따라 사찰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늦은 밤 오지의 동네를 멀다 않고 찾아 온 한국의 스님들에게 주지 타르에조티 스님은 “고맙다. 무엇으로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큰 희망이 될 것 같다”고 고마워했다.
구호품을 전달하고 콜롬보에 도착하자 시계가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9일 새벽부터 3일동안 잠 한숨을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스님들은 서로에게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라며 합장을 하고 부둥켜 않았다.
콜롬보=박기련 기자
2005-01-14 오전 10:24:14 수정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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