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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불교] 웰다잉교육 심화과정 첫 강의-김홍근 박사의 "생과 사 없는 그 자리"   2012-10-05 (금)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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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과 死 없는 그 자리 밝혀야 '- 김홍근 한국간화선연구소 책임연구원 )


2012년 09월 21일 (금) 21:45:44 정혜숙 기자 bwjhs@hyunbul.com


연기법과 참선법 통해 삶과 죽음의 의미 설명
- 웰다잉은 죽을 ‘나’ 없음을 알아가는 과정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生과 死는 하나라고 말하지만 우리 인간에게 죽음은 여전히 두려운 대상인지 모른다. 그래서 어떻게 죽느냐는 어떻게 사느냐 만큼 중요한 것이다. 결국 죽음은 삶의 종착역이 아니라 삶의 일부와 연결되는 중요한 의식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웰다잉이다. 지난 9월 19일 불교여성개발원에서 주최하는 웰다잉 심화과정 첫 강의 ‘아름다운 마침표, 그 아름다운 성장과 하나됨’이 템플스테이종합정보센터 보현실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홍근 박사(한국간화선연구소 책임연구원)는 ‘삶과 죽음, 둘 아닌 도리’를 일깨워주었다. 정리=정혜숙 기자

선(禪)은 삶과 죽음이 없는 ‘그 자리(落處/當處)’를 단도직입으로 직지(直指)합니다. 삶과 죽음은 원래 실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과 죽음이 실재한다고 생각을 하죠. 오늘 삶과 죽음이 없는 그 자리에 대해 알아봅시다.


<방거사 어록>에 이 ‘낙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만년의 방거사가 약산유엄 곁을 떠날 때, 약산이 열 명의 제자들로 하여금 산문 앞까지 전송하게 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눈이 내리자 거사가 말했습니다. “탐스러운 눈이 펄펄, 다른 곳에 떨어지지 않는구나.(好雪片片 不落別處)” 그때 전(全) 수좌가 “어디에 떨어집니까?” 하고 묻자, 거사는 손바닥으로 때리며 “그대는 남들이 선객이라 하겠지만, 염라대왕이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눈이 있어도 장님과 같고, 입이 있어도 벙어리구나.”라고 하였습니다.


방거사가 말하는 ‘그 자리’는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삶과 죽음이 없는 그 자리는 어디일까요? 자 그럼 ‘그 자리’를 먼저 불교의 핵심인 ‘연기(緣起)와 성기(性起)’를 통해 알아봅시다. 지금 여러분이 강의를 듣고 있는 보현실 법당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습니까?


연기맵을 그려 봅시다. 이 보현실은 천장 벽 기둥 바닥 전등 좌복 사람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것들은 또 땅 공기 햇빛 … 결국 우주로 연결되겠죠. 보현실은 보현실이지만, 보현실은 보현실이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假合, 一中多). 변하지 않는 실체로서의 보현실은 없습니다(諸法無我). 보현실은 보현실이 아니고, 그 이름이 보현실일 뿐입니다(<금강경>). 그리고 보현실을 구성하는 것들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으므로, 보현실도 더불어 변하고 있습니다(諸行無常). 또한 보현실은 동시에 주위에 영향을 주고 변화시키기도 합니다(多中一). 만물은 서로 맞물려 변화 중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그러면 ‘불법’이라고 할 때의 법(法, Dharma)을 오늘은 이렇게 한 번 풀어봅시다. ‘법’이란 말은 ‘진리’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제‘법’무아의 경우처럼 ‘만물’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만물은 그대로 진리’라는 말인데, 마치 법(法)이 물 수(水)자와 갈 거(去)자가 합친 것처럼, 만물의 실상은 끊임없는 ‘흐름(法)’으로서, 연기실상(緣起實相)이 바로 진리라는 말입니다. <금강경>에 ‘법은 정해져 있지 않다(無有定法).’고 했는데, 이렇게 만물의 연기실상을 바로 보는 것이 ‘법을 보는 눈(法眼)’입니다. 연기법은 서구에서 말하는 ‘존재’라는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변하지 않는 실체로서의 ‘존재’는 환영(幻影)에 불과합니다.


또한 연기법은 인과동시(因果同時)를 드러냅니다. 제가 지금 마시는 물은 어느 샘에서 왔겠죠. 이 물 자체는 샘에 있을 때나, 조금 전 컵에 담겨있을 때나, 이제 마셔서 제 몸의 일부가 된 지금이나, 그 자체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즉 물은 태어났다 죽은 것이 아니고, 그 위치가 변화되어 온 것뿐입니다. 인연(원인과 조건)따라 제 피가 되었다가, 인연이 다하면 또 다른 것으로 변하겠지요. 연기법에 의하면, 만물도 이 물과 같습니다. 만법은 태어났다 죽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연 따라 옮겨갈 뿐입니다. 이 ‘태어나지 않는 진리’를, 부처님은 법의 도장을 꽉 찍어서 ‘무생법인(無生法忍, 忍=印)’이라 하셨습니다. 따라서 ‘법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실상(法界實相)’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입니다.


이 법칙에 인간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실상 ‘죽을 나’는 없습니다. 이 우주 어디에도 없다가 새로 생겨나는 것은 없습니다. 생겨나지 않으니, 죽을 것도 없지요. 오직 연기일 뿐입니다. 부처님의 문제였던 생노병사(生老病死)에서 노병사는 생으로 인해 발생했습니다. 왜 생했을까요? 그 답은 연기법입니다. 인연과 조건에 의해 가합(假合)된 것입니다. 이 몸이 연기되어 일어난 것이며 끝없이 변해간다는 사실을 알면, 이것을 나라고 동일시할 수가 없습니다. 연기로 만들어졌지만, 태어난 실체는 없습니다. 이렇게 생멸하는 것들 즉 형상, 생각, 감정 등의 만법을 실체시하고, 특히 이 몸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이 무명(無明)입니다. 실체시하지 않고 연기실상(法)을 꿰뚫어보는 것이 명(明)입니다. 이 밝음이 반야지혜입니다.


<화엄경>에서는 이 수평적 연기를 수직적 성기(性起)로 확장했습니다. 아까 연기맵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연기법에 의해 만물은 우주에서 왔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면 우주는 어디서 왔을까요? 여기서 막히죠? 우리 안에는 정신의 벽이 있습니다. 연기맵의 만물은 사실 바탕에서 왔습니다. 우리는 형상(諸相)에 시선을 뺏겨 그 바탕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연기로 가합된 환영의 실상을 꿰뚫어보면(若見諸相非相), 그 바탕(性品)이 드러납니다(卽見如來). 수평적 차원에서 수직적 차원으로 눈을 뜨는 것입니다. 연기된 만법이 생멸하는 ‘바탕(그 자리)’의 발견! 모든 것이 그 바탕에서 들락날락 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마조와의 문답에서 심안을 연 방거사는 눈이 땅에 떨어지는 모습에서 이 바탕 자리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 바탕은 텅 빈 것 같지만, 실은 신령스런 앎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空寂靈知). 진공인 듯하지만, 생명이 가득합니다(眞空妙有). 온 법계가 오직 본래 청정한 그것뿐입니다.


마라나 존자는 ‘마음이 만 가지 경계 따라 나툰다(心隨萬境轉).’고 하였습니다. 이 마음이 진공묘유의 공(空)이자 바탕(性品)입니다. 그 바탕은 인연 따라 일어납니다(性起). 공즉시색(空卽是色)입니다. 그리고 인연이 다하면 돌아갑니다(色卽是空). 연기가 성기로 전환되면서, 바탕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리고 색과 공이 불이(不二)인 일심법계로 회통됩니다. 알고 보면 일체가 아미타불의 나툼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물 자체를 실체로 안보고 주변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상황(法)으로 봅니다. 인간도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상황일 뿐입니다. 결국 웰다잉이라는 것은 죽을 ‘나’가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으로 깊어집니다. 나는 ‘불이(不二)의 색과 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색은 처음부터 변해가는 환영일 뿐이며, 결국 나의 성품인 바탕은 생명으로 가득 차 있으니, 알고 보면 참나는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태어난 적도 없는 나가 어떻게 죽을 수가 있겠습니까? 진정한 웰다잉은 죽을 ‘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죽는다고 말하는 것은, 나라고 잘못 알고 있던 환영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 몸 받고 그 명(命)이 다하기 전에, 아상(개념으로서의 나)이 먼저 한 번 크게 죽어야 합니다(大死一番). 하지만 ‘아상’이라는 환영이 거짓으로 드러나더라도, 실제 나는 펄펄 살아있습니다(絶後蘇生). 그것은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서의 참나입니다. 웰다잉은 이렇게 한 번 당겨 죽어보는 것입니다. 생사일대사의 해결은 자아(아상)가 당겨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온통 일진법계가 드러납니다.


사실 연기에서 성기로 한 차원 올라가는 데에는, 정신의 벽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연기된 만물은 보이지만, 한 차원 높은 그 바탕은 심안이 열려야만 볼 수 있습니다. 그 정신의 벽을 뚫고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이 참선법입니다. 방거사가 말하는 ‘그 자리’를 당신은 보십니까? 바로 눈앞이 온통 그것입니다. 하지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장님 같다면, 자비로운 방거사의 한 방을 맞아야 합니다.


웰다잉은 결국 생사일대사의 해결입니다. 그 지름길은 나를 쳐줄 선지식을 만나는 것입니다. 정신의 벽을 뚫는 길은 선지식을 찾는 데 있습니다. 웰다잉은 미리 죽는 것이고, 당겨 죽으려면 선지식의 자비로운 한 방을 맞고 심연으로 떨어져 그 바닥을 쳐봐야 합니다. 지옥 밑이 꺼지면, 그곳이 극락입니다. 발밑이 무너지는 그 기막힌 맛을 한 번 보십시오. 사람이 길입니다. 지금 즉시 목숨 걸고 스승을 찾으십시오.

 

[현대불교] 지혜로운여성, 노인자살예방프로그램 강사파견 사업 
[천지일보] 전국비구니회, 세계여성불자연합 한국지부 설립 추진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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